천 문 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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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담어 자료  
       

한국어는 동서 문명의 뿌리 . 인도-유럽어의 기원 산스크리트
Sanskrit Language Cognate Indo-European Languages

작성자 권오영
작성일 2013-01-21 (월) 21:54
ㆍ조회: 2000  
IP: 119.xxx.38
불교, 신미대사 그리고 한글에 관한 특집방송 부탁
 
 
ST.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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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자신의 조카 단종을 폐하고 두 동생과 김종서, 황보인, 사육신들을 참살한
비도덕적인 왕이었습니다.
그의 불법적이고 많은 이들의 피를 부른 즉위 과정은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분명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14년이라는 재위기간동안 그가 이룬 성과는 다시 평가돼야 할 것 같습니다.
세조는 어려운 범어나 한문으로 된 불서들을 한글로 소수 번역하고,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가장 먼 지방까지, 자주 순행을 다녀온 왕이었습니다.
그것은 불교와 순행을 통해 백성들과 가까워지기 위한 세조의 위민정책이었습니다.
이 피묻은 적삼에는 세조의 인간적인 고민과 스트레스가 담겨있습니다.
정통성 없는 왕으로서 느꼈던 정신적인 억압과 그것을 만회하려는 과중한 업무가
세조가 병을 앓게된 원인이었습니다.
500년이 지나 발견된 이 한점의 적삼은
세조를 비도덕적인 왕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왕으로 다시 보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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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피묻은
적삼의 미스터리 
 
□“훈민정음 창제 일등공신은 신미 스님”
  훈민정음과 신미 스님’주제 특강 강 상 원 박사
  
 “우리말의 뿌리는 실담(범어의 음역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훈민정음 창제도 범어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 일등 공신은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신미 스님인 것입니다.”
지난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속리산 법주사 강원에서 개최한 특별강연회에서 한국세종한림원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은 집현전 학자도 세종대왕도 아닌 신미 스님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은 집현원 학사 혜각존자 신미대사’라는 주제로 강연한 강상원 박사는 “훈민정음 해제본에 나와 있는 초기 표기법을 검토하면 실담에서 유래한 흔적이 매우 많다”며 “이는 훈민정음이 실담을 기초로 제작됐고 따라서 당시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에 의해 훈민정음이 제작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박사에 따르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범어의 음가인 실담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훈민정음도 이런 범어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 했던 사람은 범어에 능통했던 사람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바로 집현전 학자였던 신미 스님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역사에서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해 신미 스님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강 박사는 “당시 숭유억불이라는 강력한 통치이념을 추진했던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고의적으로 누락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강 박사는 “영산 김 씨의 족보와, 『복천보장』에 등장하는 기록에 의하면 신미 스님은 한학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범어에도 능통한 학승으로 집현전에 초빙돼 한글 창제에 임했다는 기록이 명백하게 나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 박사가 이처럼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한 것은 10여년 전부터다. 1994년 동국대에서 ‘원효의 중도사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이후 경전을 영문화하는 작업에 몰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존 영문 경전 곳곳에서 오류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범어본 경전을 직접 번역해야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범어를 공부하게 됐다. 범어 사전을 통독한 것도 15회 이상. 범어에 대한 연구가 지속될수록 그는 한글과 범어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동국정운』에 나타난 한글 고어 표기법이 실담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도 알아냈다. 이를 근거로 그는 훈민정음이 실담에서 나왔고 따라서 범어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강 박사는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범어 관련설 이외에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이후 『능엄경』,『원각경』등 총 28종의 불교경전이 제일 먼저 한글로 번역했다는 점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며 “지금이라도 신미 스님과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왜곡된 한글창제 역사 바로잡아야” 
 
30년간 신미 대사 자료 수집 복천암 주지 월 성 스님  
 
 
 “한글 창제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신미 대사가 역사 평가에서 가려져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선 초 뛰어난 학승 신미 대사의 비밀을 밝혀냄으로써 한글 창제와 관련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을 것입니다.”
지난 30년 간 신미 대사의 자료 수집에 전념해온 속리산 복천암 주지 월성 스님은 “신미 대사는 한글창제의 결정적 영향력을 끼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학자들의 그릇된 사관으로 한글창제의 배경과 과정이 왜곡돼 있다”며 “신미 대사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75년 사형인 탄성 스님의 권유로 복천암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월성 스님은 이 때부터 신미 대사에 관한 자료 수집에 천착했다. 신미 대사와 관련된 각종 기록을 발굴 정리하는가 하면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한 것도 수십 차례. 스님은 신미 대사의 기록을 복원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다. 신미 대사의 기록을 복원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님이 신미 대사에 관한 자료 수집이 계속될수록 풀리지 않은 숙제가 남아 있었다. 당시 숭유억불 정책을 펼쳤던 조선 초기에 어떻게 신미 스님이 집현전에 들어갔으며 한글 창제에 참여할 수 있었는가가 그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복천암을 찾은 영산 김씨의 한 후손으로부터 신미 대사와 관련된 족보와 대사의 친동생 김수온이 썼다는 『복천보장』을 전달받고 스님은 이 같은 의문을 하나씩 풀어갔다.
“신미 대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해 스님이 어떤 인물인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산 김 씨의 족보에 신미 대사는 태종 때 영의정까지 지낸 귀족가문 출신이며 범자에 능통한 분이었다는 기록을 보고 신미 대사에 가졌던 의문을 하나씩 밝혀나갔습니다.”
스님은 『복천보장』과 영산 김 씨의 족보를 통해 신미 대사는 한학에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범서 장경에도 능통한 학승으로 집현전에 초빙돼 한글 창제에 임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스님은 또 한글의 모음과 자음이 범어 글자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은 당시 범어에 가장 능통했던 신미 대사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특히 스님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이후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능엄경』, 『원각경』등 총 28종의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불교에 대한 깊은 식견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한글 창제의 배경에 신미 대사가 제외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스님은 또 이 같은 한글 창제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신미 대사가 후대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당시 숭유억불이라는 강력한 통치이념을 추진했던 시대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스님은 “실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신미 대사에게 ‘선교도총섭밀전정법지비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라는 내리자 수많은 유생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는 이후 문종 대까지 계속된다”며 “이런 이유로 한글창제를 주도했던 신미 대사가 역사적으로 가려지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제는 신미 대사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때”라며 “왜곡된 신미 대사에 대한 기록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한글 창제의 역사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은=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의문투성이 한글기원…신미 스님이 열쇠
성현-이수광-이능화의 梵字 기원설과 부합
□ 의문투성이 한글 기원 --- 신미대사가 열쇠
 
<사진설명>훈민정음 보급의 일등공신 신미 대사는 범자(梵字)와 티베트어에도 능통했다.(좌) 그러나 유학자들의 질시로 그가 번역한 경전마저 나중에는 삭제되는 비운을 맞는다. 초판본(中). 초판본에 들어있던 신미 대사 법호가 재판본에는 빠져있다.
지난 2001년 12월 서울대 언어학과 이승재 교수가 발표한 "훈민정음 각필부호 유래설"은 신미대사가 한글창제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각필’은 고대 문헌에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한자 옆에 점과 선, 또는 글자를 새겨 넣어 발음이나 해석을 알려주는 양식으로 이 교수가 고려시대의 불교경전을 조사해본 결과 각필 중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과 무려 17개가 일치하고, 자음과 모음의 체계까지도 대단히 유사함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러한 학설은 세종대왕이 수양대군 등 아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불교경전에 정통한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토록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사료를 통해 밝히고 있듯 "평소 몸이 약했던 세종대왕이 한글이 창제되기 4년 전부터는 정사를 돌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고, 이로 인해 가장 중요한 일과의 하나인 경연(經筵)조차 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신미대사는 당시의 대표적인 학승으로 범어를 비롯한 인도어와 티베트에도 정통했으며, 불교경전에도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신미대사가 세조 2년(1456) 범어계통의 인도 문자와 티베트어로 쓴 친필 진언과 부적류들을 분석한 허일범 진각대 교수는 "상당히 많은 분량임에도 오자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정확한 자형을 이루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한글창제와 관련해 수백년 동안 ‘범자(梵字) 기원설’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조선전기 학자인 성현(1439~1504)은 "훈민정음은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으며, 이수광(1563~1628)도 "우리나라 언서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 모양을 본떴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언어학자인 황윤석(1729~1791)은 "우리 훈민정음의 연원은 대저 범자에서 근본하였으며 범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했으며, 이능화(186 9~1943)도 한글글자법이 범자에 근원한 것이라며 비슷한 용례까지 들고 있다. 이런 주장들은 미국인 학자 헐버트(1863~1949) 등 외국인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도에서 범어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봉태 목사도 지난 2000년 말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을 통해 한글의 기원이 범어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일련의 학설들 또한 여전히 많은 연구와 검증의 절차를 남겨 놓고 있음에도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 적극 참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범자기원설은 한글창제 당사자들이 불교경전 및 그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고 있었음을 의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자연스럽게 당시 왕과의 교분이 깊고 언해본 간행을 비롯해 경전언어에 깊은 조예가 있는 신미대사를 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추정이 사실이라면 실록에서는 왜 그런 기사가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고 강조하는 것일까. 동국대 황인규 박사는 "당시 억불숭유의 정치적 상황에서 승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한 불신과 반발이 더욱 거셌을 것"이라며 "이는 세종대왕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자 대의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유교의 이데올로기만을 숭상했던 조선시대가 초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난 94년 작고한 이숭녕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미대사만치 유명한 고승이 후세에 남긴 법어나 시, 글 한편 없이 너무나 적막한 생애를 스스로 걸어갔다"며 "학덕이 높고 국어학사상 특기할 인물이었지만 사회의 냉랭함에서 쓸쓸히 입적한 가여운 인재"라고 애석해했다.
지난 550여 년간 이념의 벽으로 인해 스스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고승 혜각존자 신미스님. 이제 그의 위상과 업적을 올곧게 복원하고 선양해야 하는 것은 이제 후학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한글 창시 자는 신미선사
 
 
탄압,배척을 받았던 시대의 불교역사와,인물에
 
관한 사실들은 너무나 왜곡,삭제가 많음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특히, 불교의 임진왜란 역사는 철저하게 왜곡 삭제되어 있어
 
민족 정기에 크나큰 치명타 까지 주고 있어 자못 심각해 짐은
 
한사람의 염려는 아니리라 여겨집니다.
 
  역사 왜곡 삭제는  문화재를 파괴하는 행위나 다름없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 땅의 사이비
 
지식인들  하루빨리 각성 하시기를 바라면서,,,,,,,.@
 
 

              한글 창시자  신미선사
신미선사는  충청북도 영동에 영산 김씨 가문에서 부 친 김훈과 모친 여흥 이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 입산 전에 부친께서 진사 벼슬에 등과 한 후 태종때에 영의정 까지 지낸 귀문가문 출신이기에 속가에서 사서삼경을 모두 설렵하고 출가하여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범서로된 장경이 중국에서 들어와 여러 고승들에 의하여 번역 되었으나 마음에 차지않아 범서로 된 원전을 보기 위해 범어(梵語) 공부를 하였다.
 조선 제 4대 세종대왕은 중국의 한문 글이 너무어려워 백성들이 문맹인이 많아 배우기 쉬운 우리글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우리글을 만들 결심을 하자  전국을 총망라하여 숨은인재를 발굴할때 ,충청북도 속리산 복천사에 주석하고 있는 신미선사가 세종대왕의 부름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하게 되었다.
  1446년까지 4년에 걸쳐 논의 한 끝에 신미선사는  모음,자음 소리글을 범서에서 착안하여 한글을 마 무리 짓고 시험할때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인하여 (법화경,지장경,금강경,반야심경) 등을 토도 달아보고 번역도 하여 시험을 끝내고 우리글이 완성 되었다고 보고 하니 임금은 기뻐하여 1446년 9월  상달에 우리글을 훈민정음이라 공포하고 우리글이 만들어 졌으니 우리글로 노래도 한번 지어보라하여  월인천강지곡과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그후 세종대왕은 신미선사가 주석하고 있는 속리산 복천사에 아미타불과 좌우보처 관음양대보살을 목각조성 시주하시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시호를 ''선교도총섭밀전정법지비쌍운우국이세원융무애혜각존자라'' 지어문종에게 위임하여 문종이 부왕을 대신하여 신미선사께 사호하였다.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세상에 공포한후 집현전에 같이 참석하였던 성삼문,정인지,같은 유생들이 말하기를 한글에 대하여 신미대사의 공은 인정을 하되 발기를 세종대왕이 하셨으니 그 공을 세종대왕에게 돌리자 하여, 심미선사가 쾌히승낙하니 그후로 한글은 세종대왕이 지은 것으로 되었고 ,모든문헌등에 신미선사가 집현전에 참석함 까지도 밝히지않고  공은 왕께로 돌리기로 하였기에 그기에 대 하여는 모든 문헌에도 신미대사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으나 유일하게 영산김씨 족보엔 세종의  초빙을 받아 집현전에 참석 하였다 는 기록이 되어있다. 유생들은 신미선사가 승려의 신분으로  
 한글창시를 주도한데 대하여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다가  세종이 서거한 후 한글에 대하여 과소  평가 하기 시작하여 ,언문이니 부녀자들이 뒷방 에 앉아서 친정에  편지나 써서 보내는 글이니 통 통시글이니 하며 이것이 무슨 글인가 장부들이 배울 글이  못 된다고 비양 거렷다.
 그러나 신미선사는 세종대왕의 뜻에따라 누구든지 배우기 쉽게 만든것 뿐이기에 유생들의 그러한 비웃음에도 개의치 않았다.아니 불교를 탄압배척한 유생들의 악랄함에 그 정도의 비웃음은 가벼운 봄 바람과 같은 것이니까,,,,,.
 유생들은 유서에만 능했고 ,신미선사는 불경,유서 범서 등 모두에 능하여 범서에서 착안한 한글 논의에 대하여 유생들은 일체 반론도 한번 못했고, 시종일관 신미선사의 뜻한바대로 마무리 되었다.
집현전에서 4년간이나 학자들과 머물러 있었기에 학자들을 보살피는 한글도감은 수양대군이 맡았다. 수양대군은 오래도록 학자들을 보살피면서 그중에서 신미선사를 가장 존경하였다.한글이 신미선사의 주도하에 이루워졌고 덕이높고 지혜가 뛰어나고 젊잖고 용모도 거룩하기 때문이였다.
  한글창시를 마치고 집현전에서 속리산 복천사로 돌아오고 난후 세월은 흘러 세종이 문종에게 전위하고 문종은 병약하여 일찍 돌아가시자 12세되는 어린단종이 즉위를 하니 수양대군이 섭정하게 되었다.
  섭정한지 얼마되지않아 수양대군을 따르는 간신들이 어린왕을 가지고 형식만 취할것이 아니라 대군께서 직접 정사를 맡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수차레 간청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계속집권할것을 강요하니 하는수없이 혁명을 일으켜 단종을 영월로 귀양보내어 죽이고  수많은 학자와 대신들이 희생  당했다.
 어느날 밤 꿈에 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서''네가 아무리 용상이 탐이 나기로 서니 어린
카를 살해까지 할수 있느냐! 이 더러운놈아!''하고 얼굴에다 침을 뺕은 꿈을 꾸고 깨어보니 온몸에 부스럼이 생기엇다.
  그 당시에는 혁명중이라 죽느냐 사는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에 병에 대한 관심이 없다가 어느 정도 평정이 되니 병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약도 쓰고 치료를 하엿으나 백약이 무효 인지라 약을 쓰게 되면 병세가 점점 더 악화 되어 마음이 불안하고 흔들리기 시작 하였다.    
용상을 보니 쳐다 보기도 싫고 그렇다고 산에들어가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으나 그러할 수도 없고 진퇴 양난 이였다.그리하여 곰곰히 생각하니 지난 날 신미선사가 생각나서 신미선사를 찾아 뵙기로 하고 사전 통보를 한뒤에 4,5백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청주에 와서 2일간을 쉬고 보은 말티재 밑 대궐터 지금 장재리에 하룻밤을 자고 세조 10년 갑신년 天順 8 年2월 28일 신해일에 말티재를 넘어 큰 소나무 밑을 지나는데, 연이 소나무 가에 걸릴것 같으므로 세조대와이 보고 연걸린다 고 하니 연을 낮추기 전에 소나무 가지가 저절로 번쩍들렷다.그리하여 연이 상하지 아니했다.
 세조대왕은 하도 이상하여 연을 멈추고 그 사실을 이야기 하니 한 신하가  임금을 알아 보는 소나무 이니니 벼슬을 주자고 하자 무슨 벼슬을 주면 좋겠는가 하자 정이품 벼슬을 주는것이 좋을 듯하니그 자리에서 정이품 벼슬을 주었다.
 정오에 복천사에 당도하니 당대의 고승이신 신미선사와 수미,학조,학렬.등 많은 스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법당으로 안내 참배케하고 3일간  기도와 법문을 듣고 마음이 편안해
졌다.안정을 얻은 세조대왕은 환궁할때에 신미선사는 청을 한가지 드렷다. 세조가 무엇이냐고 묻자 신미선사가 강원도 오대산에 월정사가  있고 그위에 상원사가 있으며 상원사 위에 중대가 있어 우리나라 오대 적멸보궁 중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궁이 있습니다.(부처님 머리부분에서 나온 사리) 그러나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신도들도 가는 이가 드물어 건물이 붕괴 직전 입니다.
대왕께서복원을 해주시면 그공이 헛되지않을 것입니다.하니 세조께서 즉시 나라에서 하지요,
이곳에서 보궁 복원에 감독할 분을 보내주세요. 하여 그자리에서 학열스님을
보궁 감독으로 임명하여 보내었다.(계속)

“한글창제 주역은 신미스님”
  
 한글날 특집‘훈민정음과 불교’  
 梵字-티베트어에 능통…불경 간행 주도
세종이‘존자’칭호…‘집현전 참여’ 기록도
억불 정책으로 공헌가려져…재조명 있어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로 손꼽히는 한글.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분명하지만 한글의 기원이나 문자를 만드는데 기여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당부분 의문점이 남아있다.
본지가 한글날 558돌을 기념한 특별취재에 따르면 훈민정음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혜각존자 신미(信眉, 1405?~1480?)대사가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신미대사는 세종과 문종의 여러 불사를 도왔을 뿐 아니라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전을 번역, 간행했을 때 이를 주관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특히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2300여 쪽은 이르는 방대한 양의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몽산 등 고승법어를 훈민정음으로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신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하는 상당수 한글문헌은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신미대사가 한글창제에도 크게 기여했을 거라는 주장이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다. 먼저 세종대왕과의 관계다. 비록 신미대사가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세종이 죽기 5년 전인 세종 28년(1446)이지만 그 관계가 대단히 친밀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죽기 몇 달 전 신미대사를 침실로 불러 신하로서가 아닌 윗사람의 예로 신미대사를 대하고 있으며, 당시 신미대사가 머무르던 속리산 복천암 불사를 지원하고, 대사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존자’라는 명칭이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고, 더구나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는 문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 영산 김씨 족보에 ‘수성(신미대사)은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과 신미대사의 친동생이자 독실한 불자였던 김수온이 한글창제 이전에 이미 중앙에 진출한 상태였다는 점도 이와 관련된다는 가설의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는 불교의 신성 숫자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은 새로운 문자의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김광해 서울대 교수) “방대한 양의 불경이 한글이 창제 된지 얼마 안 되는 기간에 한문본이 편찬되고 번역까지 됐다. 이는 한글 반포 이전부터 불경에 정통하고 있었으며, 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의 운용법과 표기법에 통달하고 있던 인사들이 있어서 이 사업을 추진했다는 증거다.”(강신항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 같은 기존 학자들의 주장도 그 당시 대표적인 학승이었던 신미대사를 상정할 경우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특히 얼마 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한글 기원은 고려불경의 각필부호”라는 학설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는 견해가 많다.
지난 30년째 신미대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해오고 있는 복천암 주지 월성 스님은 “억불숭유의 시대로 말미암아 신미대사의 공헌은 철저히 가려지고 삭제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라도 그 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신미대사는?
신미대사는 부친이 태종 때 정승까지 지낸 양반 가문인 까닭에 입산 전 유학 경전을 섭렵할 수 있었으며 출가 후에는 대장경에 심취했다. 그러나 한문 경전이 마음에 차지 않아 범어와 티베트어를 직접 공부하기도 했다. 특히 세종, 문종, 세조 때에는 경전번역 등 불사를 이끌었으며 예종이 불교탄압하려 할 때는 언문 상소를 올려 부당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2004-09-29/773호>
 
한글어지 108자 … 월인석보도 108쪽
   
 한글창제와 숫자의 비밀
  
 어느 종교건 특정 숫자를 신성시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불교는 유독 그런 성향이 강하다. 심지어 0에서 무한대에 이르기까지 숫자를 불교적으로 해석한 『대명법수』라는 책이 나올 정도다. 이런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가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표면적인 목적 외에도 불교를 보급하고자 하는 은밀한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진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대 국문과 김광해 교수의 ‘훈민정음과 108’론이 바로 그것이다.
 김 교수는 그동안 『한글창제와 불교신앙』(불교문화연구 제3집) 등 일련의 논문을 통해 창제 과정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불교의 대표적인 신성수 ‘108’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는 한편 그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 당사자들의 의도적인 조절임을 주장했다.
 김 교수가 먼저 주목한 것은 ‘나랏말싸미듕귁에달아…’로 시작하는 한글 어지(御旨)와 ‘國之語音異乎中國…’로 시작되는 한문 어지다. 한글은 모두 108자고 한문 어지는 108의 꼭 절반인 54자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김 교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더부러’ 등을 고의적으로 누락하는 등 적어도 4글자 이상이 탈락됐다는 것이다. 또 한문 어지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而己矣’를 사용하지 않고 ‘耳’를 사용하고 있는 등 글자의 수를 맞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담겨 있음도 함께 지적했다.
 훈민정음 창제과정에 나타나는 숫자의 비밀은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 교수는 108글자의 세종 어지가 실린 『월인석보』 제1권의 장수(張數)도 108쪽임도 밝히고 있다. 특히 다른 권들과는 달리 일련의 이야기를 중간에 잘라 별도의 권으로 만들면서까지 쪽수를 맞추고 있다는 것. 또 현재 국보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의 경우 불교적인 우주관을 상징이라도 하듯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이들 경우 외에 다양한 사례를 하나하나 제시하며 “훈민정음의 창제 당사자들이 이렇듯 일련의 주도면밀한 노력을 은밀히 기울인 것은 불교 보급의 목적이 담겨 있다”며 “그러한 종교적 염원이 숫자를 조절하는 은밀한 방법으로 나타났다”고 결론 맺고 있다.
실제 세종에서 연산군 때까지 발간된 훈민정음 문헌의 65%이상이 불교관련 문헌이며, 유교 문헌은 단 5%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재형 기자
<2004-09-29/773호>
“집현전 학자들 한글창제 무관”
  
 훈민정음에 대한 오해
  
 한글창제는 지금까지 신숙주와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만들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이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창제를 주도했다는 이론은 설득력이 없는 쪽으로 굳혀지고 있다.
 한글창제 이후 가장 크게 반발한 것이 집현전 학자들이며, 당시 집현전 부제학으로 실무담당을 맡고 있던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등조차 “굳이 언문을 만들어야 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들까지 널리 상의한 후 후행해야 할 것인데 갑자기 널리 펴려 하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다”고 상소를 올리는 것 등의 정황으로 볼 때 집현전 학자들이 돕기는커녕 몰랐던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1443년 12월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선언할 때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비밀리에 추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성삼문은 한글이 창제될 무렵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신숙주는 창제 2년 전에 들어왔지만 그 다음해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관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록에도 전혀 그런 말이 없다. 잘못된 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세종께서 이런 사실을 알면 통탄할 것”이라는 여증동 경상대 국문과 명예교수의 말처럼 집현전 학자 창제설은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따라서 이들 집현전의 소장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세종의 명을 받들어 훈민정음의 보급에 앞장섰을 뿐이다.
이재형 기자
<2004-09-29/773호>
“집권 초 억불…중반이후 호불로 전향”
  
 세종대왕과 불교
  
 태종에 이어 1418년 즉위한 세종은 강력한 유교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즉위 초기 배불(排佛)에 앞장섰다. 불교를 약화시키기 위해 7개 종파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하는가 하면 “불교를 점진적으로 제거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은 공적으로 유교를 내세웠지만 사적인 부분에서는 초기부터 불교에 대한 애정이 나타난다. 집권 초 사찰의 건립 보수에 앞장섰는가 하면 왕실불교를 일으키는데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였다.
세종은 또 정권 중후반기인 즉위 20년 무렵 친불교적인 성향을 본격화하면서 조정 대신들과 불교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집권말기에 이르러서는 왕실에 내불당을 건립(즉위 30년)하는 등 적극적인 호불(好佛)정책을 추진했으며 반발하는 대신들에 대해 오히려 강력히 제지하기도 했다.
실제 세종 즉위 28년 3월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대군들이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편찬하겠다고 하자 이를 공식적으로 허락한다.
그러나 당시 우부승지 이상철, 좌승지 황수신 등이 중심이 된 조정 대신들과 전국의 많은 유생들은 세종대왕의 불교 신봉을 비판하는 상소를 잇따라 제기했다. 그러나 세종은 “경들은 고금의 사리에 통달해 불교를 배척하니 가히 현신(賢臣)이라 이를 만하다. 나는 의리(義理)를 몰라 불법을 믿고 있으니 가히 무식한 임금일 것이다.…이제 그대들의 뜻을 훤히 알겠으니 번거롭게 다시 청하지 말라.”며 대신들을 비꼬기도 했다.
세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가) 공자의 도(道)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주자가 잘못됐다고 했으나 이는 석가모니를 잘 몰라서이며, 천당지옥·사생인과는 명확한 이치가 있으며 결코 허탄(虛誕)한 것이 아니다”라며 불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기도 했다.
이 같은 세종의 자비와 지혜가 결국 뭇백성들의 눈을 뜨게 한 글을 만들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 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오영 기자
<2004-09-29/7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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